조선의 실학자 정약용과 여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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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년 9월 중순 노을이 지는 어느 날 오후 늦은 시간, 정약용이 17년간의 전라도 강진 유배에서 해제되어 고향인 경기도 마재로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아내 혜완(惠婉)은 큰아들 학유와 함께 나루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남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드디어 저만치 강을 거슬러 다가오는 뱃머리에 약용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못난 정치에 의해 강요된 별거 부부가 다시 만나는 순간을 소설은 다음과 같이 깔끔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정약용과 여인들

정약용

『‘그때 혜완이 악, 마른 비명을 삼켰다. 그의 오른팔 아래 감싸고 있는 작은 계집아이, 저것이 어쩌자고, 여기가 어디라고 촐싹촐싹 따라왔단 말인가? 남편 뒤에 몸을 가리고 서있는 여인, 검정색 무명 치마에 치잣빛으로 물들인 무명 저고리. 저것이 기녀인가, 여염집 아낙인가, 어찌 저다지 날쌍하단 말인가?

혜완이 갑자기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심장을 쓸어내렸다. 눈가에 스멀거리는 불티를 손등으로 문대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아버님이 손을 흔드시는데. 어머님 어째 돌아서십니까? 부디 체통을 지켜주세요.”

학연의 두 손이 모친의 어깨에 얹히더니 혜완을 돌아 세웠다. “체통이라니, 무슨 말버릇이더냐?” 다정한 모자간에 서릿빛 금이 그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약용이 아내 혜완에게 건네고 싶어 했던 가슴 속 말을 들어봅니다.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아 부드럽고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여야 할까. 유배는 감옥이고, 그 깜깜 지옥의 내용은 진솔이었노라고 말한다면 염치없음의 극치일까? 하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라 하지만 나는 피와 살을 가진 보통의 사내에 불과했소. 내 몸뚱이에 얼음꽃이 슬어 운신이 어려울 때 한 줌의 온기로 날 데워주었다오.’』

원래 홍예완은 무인의 가문에서 자라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한 살 어린 약용에게 시집을 왔습니다. 그리고 40대가 될 때까지 사대부 여인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았지요.

그러나 약용이 유배를 떠나 17년 동안 집을 비우자 홀로 가사를 떠맡아 두 아들 학연, 학유와 외동딸 홍연을 반듯하게 키워 냈습니다. 그런데 새 여자라니?

결국 며칠 후 혜완은 약용에게 미리 상의하지 않고 진솔과 그녀의 어린 딸 홍임 모녀를 집에서 내 칩니다. 그럼에도 역시 여필종부 조선시대 여인이었던 혜완의 속은 쓰리기만 합니다. 다시 소설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홍임 모녀를 내친 것은 약용이 신조로 삼았던 삶의 도리를 어긋나게 한 짓거리였다. 그것이 혜완의 평온을 물어뜯었다. 남편의 핏줄을 내쫒았다. 진솔이야 어쨌든 그 아이만큼은 거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늘의 도를 거스르지 않았는지, 구겨진 심지가 맥박을 꼬집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유배지였지요. 유배지에서 약용이 진솔과 밤을 같이 하는 장면을 들춰 봅니다.

‘꺾인 중년의 서투름이었다. 깊고 뜨겁고 소슬한 진솔의 안에 그는 자신의 모두를 들이부었다. 새롭고 독한 몸의 마성이었다.’

이번에는 진솔이 약용의 집에서 쫓겨나는 장면을 비춰 봅니다.

『어린 홍임은 새벽잠이 곤했다. 졸음기 덜 깬 홍임을 진솔이 보듬고 문간방을 나섰다. “마님, 평안하소서. 이만 물러갑니다.” 진솔이 허리를 구부리고 반절을 올렸다. 대청에 꼿꼿이 서 있는 안방마님은 서릿기둥이었다. 푸름을 시들게 하고 만물을 쇠하게 만드는 서릿발, 두고 가는 그분의 심상에 서리꽃을 피우지나 않을지, 진솔은 자신의 당찮은 오지랖이 민망했다. 무슨 야속한 말을 해서가 아니었다. 내리뜬 눈이 천 마디 말을 하고 있었다. 여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소설의 앞 부분에 나오는 세 꼭지들인데요.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내용 전개를 미리 짐작해 볼 수 있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의 초점인 정약용의 삶의 빛깔과 그에 얽혀진 여인들의 갈등과 공감, 인간적 모습이 압축해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다산 정약용과 그에 얽힌 여인들의 삶을 온전히 비춰보려면 먼저 그의 삶을 대략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약용은 조선 영조 때인 1762년 오늘의 경기도 남양주에서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는데, 성인이 된 후 그의 일생은 크게 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1기는 젊은 나이에 관료로서 승승장구하던 시절입니다. 22살에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18년 동안 정조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경기 암행어사, 동부승지 등을 두루 거치고, 한강에 배로 만든 다리를 설치하고 수원성을 설계하는 등 가시적인 업적도 남겼지요.

그러나 정조가 죽자 다산은 자신을 둘러싼 조정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가에 ‘여유당’이라는 편액을 내걸고 은인자중하였습니다.

여유당은 노자의 도덕경에서 따온 말로 ‘망설이면서 겨울 냇물을 건너듯이, 주저하면서 이웃을 두려워하듯이’라는 뜻입니다. 이 하나만 보더라도 당시 다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요.

2기는 전남 강진에서 57살까지 17년간 유배 생활을 한 시기입니다. 정조가 죽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한 다음 해에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와 노론 세력에 의해 일어난 신유사옥의 피바람 속에서 천주교 신자로 탄핵받은 것이지요.

이 기간은 유배지의 엄혹한 생활환경으로 몸에 병이 들고, 관료로서 암울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학자로서는 자신의 학문을 완성하는 수확기였습니다.

특히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후 10년 동안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강학과 연구에 전념하며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의 저술을 통해 조선 사회를 개혁하는 여러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3기는 유배에서 풀려난 후, 1836년 75세의 나이로 삶을 마칠 때까지 18년 동안 고향에 은거하던 시기입니다. 이때 그는 강진에서 마치지 못했던 저술 작업을 마무리하고, 500여 권에 이르는 자신의 저서를 정리하여 ‘여유당전서’를 편찬하였습니다.

지은이가 소설을 전개하는 방식은 사건의 시간적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붓 가는 대로 편하게 뒤섞어 쓰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정약용과 가족들, 그의 여인들, 정치적 앙숙들, 그리고 당시 조선후기의 암울한 사회현실이 알맞게 버무려져 피고 지는 삶의 굴곡들을 쉽게 이해하고 몰입하게 만듭니다.

그 비결은 아마도 지은이가 미묘한 인간 심리를 꿰뚫어 보고 핵심을 짚어 내어, 유려한 표현으로 갈무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의 나이를 들먹이는 것이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지은이가 이 책을 펴낼 때 나이가 83세입니다.

헌데 사람들 사이에 얽히는 감정을 어찌 그리 섬세하고 농밀하게 짚어낼 수 있는지, 표현은 또 어찌 그렇게 깔끔하고 방금 감은 머릿결처럼 보송보송하게 와 닿는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삼 세월의 먼지에 녹슨 나 자신의 감성을 돌아보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약용은 잘 아시다시피 실학의 대가로, 조선 최고의 경세가입니다. 개인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의 을파소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애민(愛民)의 경세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정약용이나 을파소를 생각할 때면, 우리 화폐에 왜 이이나 이황의 얼굴이 그려졌을까 의문이 들곤 하지요.

아무튼, 이 소설은 경세가이자 실학자로서가 아닌 인간 정약용의 속살을 비춥니다.

소설이 정약용을 바라보는 눈은 250여년의 시간을 넘어 정약용, 그리고 부인 혜완, 모진 유배지에서 그를 돌본 진솔, 기생 초선, 두 딸 홍연 홍임과의 사이에 엉켜진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가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 중 특히 인상적인 몇몇을 추려 음미해 보겠습니다.

먼저, 정약용이 부인 혜완을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얼음송곳 같은 우아함, 혜완의 몸에 내밴 서릿결이었다. 혜완은 서리처럼 희고 차가웠다. 젊은 날 약용은 그런 혜완의 야윈 몸피를 무욕한 청결함이라 아꼈다. 살이 없어 아무 옷이나 걸쳐도 휘어질 듯 낭창한 뒤태가 한 그루 목련인 듯 아릿했다.’ “혜완, 당신은 내 숨이었다오.” 』

그 혜완이 약용의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회한을 내뱉습니다.

“진솔과 홍임은 내 안에 다른 이름으로 저장된 지옥의 이름이었답니다. 내가 어찌 그들을 품지 못했는지, 그것은 오로지 당신을 내 품에 품고 싶었던 옹졸한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다음은 진솔이 약용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어쩌다 이런 분의 밥 시중을 들게 되었는지, 뭔지 모를 가득함이 가슴을 채웠다. 웅덩이처럼 패어 있던 가슴이었다. 마를 날 없이 구정물 같은 가슴 웅덩이가 출렁거렸는데, 그의 곁에 머물면서 그 검댕이 구정물이 정화수가 되었다.’

이번에는 약용이 진솔을 보는 눈입니다..

『‘유배지 강진에서 홀연 나타난 진솔이라는 여인이 안겨준 평온, 나른한 휴지를 그는 탐욕스럽게 껴안았다. 깊고 따스하고 청결했다. 그가 질색하는 행동거지를 보이지 않았다.’ ‘진솔, 그대는 내 목젖에 걸린 가시요’』

그렇다면 결국 혜완과 진솔, 두 여인을 대하는 약용은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촛불이 혜완의 빛이라면 진솔은 무명실을 꼬아 들기름 종지에 불을 물렸다. 유배지에서 한동안 혜완이 켜준 촛불이 맘속에서 타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촛불 대신 하얀 보시기에 무명 심지를 꼬아 비스듬하게 뉘인 들기름 종지가 그의 가슴에서 타올랐다. 진솔의 기름 보시기였다. 그 조금은 엷고 느슨한 조도가 기운 시력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촛불의 광휘한 불꽃은 화려하고 주변의 사물을 돋보이게 했다. 비스듬 뉘인 기름 종지의 그림자는 정갈하고 다소곳했다. 선호하는 질량이 더하고 덜하고를 떠나 두 여인이 만들어내는 불꽃의 내밀화는 그의 강마른 심지에 한줄기 수액으로 촉촉했다. 과한 욕심인가?’』

아울러 소설은 두 아들 학연과 학유, 제자들, 교우 혜장스님과 초의선사, 피곤한 삶에 고통 받는 조선의 민초들, 그리고 정조와 노론의 관리들을 등장시켜 정약용이 처한 시대적 상황과 고뇌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만, 정약용과 직접 관계되는 인물들의 감정 파동에 집중하다 보니,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서민들의 고단한 일상이 축약되어 결과적으로 정약용의 삶이 그들과 따로 노는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뭐랄까, 잡초 무성한 들판에 한 송이 백합을 옮겨 놓은 듯 한 이질감이랄까요? 하긴 시대를 초월한 정약용 같은 인물이 오늘에 매달려 사는 서민들의 눈높이로 내려와 어울리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더 멋진 내용을 바라는 제 욕심이겠지요.

그럼에도 정약용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갈등에서 병든 조선의 실상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노론의 영수 격이었던 서용보지요. 둘의 악연은 서용보가 경기관찰사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정약용은 경기 암행어사로, 관리들의 부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관찰사인 서용보의 부정을 사실대로 정조에게 보고하여 파면시킵니다.

그러나 서용보는 그 후 20여 년 동안 남다른 정치적 수완으로 삼정승의 자리에 맴돌며, 고비마다 ‘천 사람을 죽여도 정약용 하나를 죽이지 못하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다.’며 물고 늘어집니다.

유배 기간이 17년이나 되었던 것도 서용보의 짓이었지요. 물론 인간관계에서 좋고 나쁨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정을 저지르고, 더구나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큰소리치던 사람과 그 일당이 20년이나 삼정승의 권력을 누리던 나라, ‘인사가 만사’인데, 그 실상이 오죽했을까요?

그런 사회에서 유배 죄수 정약용이 할 수 있던 일은 오직 책을 읽고, 쓰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열매가 저서 500권! 유배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해마다 14권 정도를 쓴 셈입니다.

오늘처럼 컴퓨터가 없던 당시에 놀라운 양이죠. 너무 오래 앉아 글을 쓰다가 엉덩이가 곪아 앉을 수가 없게 되자 벽에 선반을 만들어 놓고 서서 집필을 계속했다고 하니, 그 정성과 정열이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정약용은 스스로 호를 다산이 아닌 사암(俟菴)이라 불렀습니다. ‘초가집에서 기다린다’. 말하자면 후일을 기약한다는 뜻이지요.

잘못만난 시대를 사무치게 살다가 후대를 기약하며 떠난 비운의 천재 정약용! 그가 바라던 내일은 무엇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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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정약용과 여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