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럽의 충격 역사 3 | 인간 제물로 바치다!

로마의 인간 제물

매년 3.14일에 가죽옷을 입은 한 명의 남자가 여기저기 끌려다니면서 길고 흰 막대기로 흠씬 두들겨 맞고 로마에서 추방되었다. 이 남자는 마무리우스 베투리우스 즉 “늙은 마르스”라고 불렀다.

이 의식이 오래된 로마력 (로마력에 의하면 새해는 3.1일부터이다)

제물

첫 번째 오는 보름 전날에 거행된 것으로 보아서 이 가죽 옷을 입은 남자는 지난해의 마르스를 의미하고 있고 새해 벽두에 추방되었다. 그런데 마르스는 원래 전쟁의 신이 아니라 식물의 신이었다. 마르스에게 로마의 농부가 곡식이나 포도의 풍작, 과실수나 숲의 풍요로움을 기원했기 때문이다.

​또 곡식의 성장을 기원하며 제물을 바치는 역할을 맡았던 아르바레스 신학원이 한결같이 기원한 대상은 마르스였다.

이 로마의 추방의 시기에서는 신을 상징하는 인물은 식물의 신으로서만이 아니라 제물로서도 취급되었던 듯하다. 그 사람을 추방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단지 식물의 신이었다면 왜 로마에서 추방했는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제물의 의미도 있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국경 밖으로 쫓겨나건, 애처롭게도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국경 밖으로 쫓겨나거나, 애처롭게도 짊어지고 있는 무거운 짐을 국경 밖으로 옮겨야 한다. 마무리우스 베투리우스는 로마의 적인 오스크 인의 나라로 추방된 듯하다.

“늙은 마르스를 흠씬 두들겨 패고 로마에서 추방하는 의식을 거행한 것은 마르스를 섬기는 춤 추는 신관 살리 Salii인 것 같다. 3.14일에는 신의 화신인 인간이 그 신을 섬기는 신관에게 두들겨 맞으면서 로마에서 쫓겨나는 기묘한 광경이 되풀이되었다. 두들겨 맞고 로마에서 추방된 사람이 약해진 식물의 신이라고 가정하면 이 의식은 일단 이해할 수 있다.

새해를 맞이해서 약해진 식물의 신은 새로운 활력으로 넘치는 젊은 신에게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마르스를 섬기는 춤 추는 신고 나은 뛰어오르거나 춤을 추기 때문에 살리라고 부르는데 그 신관은 매년 로마 정치의 중심인 민회에서 엄숙한 종교의식으로서 춤을 출 의무가 있었다.

봄인 3월과 가을인 10월에 그 성스러운 의무를 수행하며 로마의 파종을 주관하는 신인 사투르누스에게 기원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서는 곡식이 쑥쑥 자랄 수 있도록 농민이 춤을 추거나 위로 뛰어오르는 관습이 꽤 오랫동안 행해졌다.

그리스의 인간 제물

고대 그리스에도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의 고향인 카이로네이아에서는 이런 종류의 의식을 공회당에서는 집정관이 거행하고 가정에서는 가장이 거행했다. 이 의식은 “기아의 추방”이라고 불렀다. 아그누스 카스투스의 나뭇가지로 “기아는 밖으로, 부와 복은 안으로 ”라고 말하면서 노예를 두들겨 패며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나 그리스 문명이 발달하자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관습은 인자하고 경건한 플루타르코스가 거행한 소박한 의식에 비해서 음울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리스의 식민지 가운데 가장 활기가 넘쳤던 마르세유에서는 역병이 돌 때마다 빈곤계층의 남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 그 남자는 1년간 공금으로 생활하며 고급스럽고 깨끗한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나면 성스러운 옷을 입고 성스러운 나뭇가지로 장식하고서 사람들에 의해서 시내를 끌려다녔다. 그러면 사람들은 모든 재난이 그 남자에게 떨어지도록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그는 성 밖으로 쫓겨나든지 성 밖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아테네에서는 타락한 쓸모없는 인간들을 공금으로 부양했다. 역병 한발 기근 등의 재난이 닥쳐오면 공금으로 부양한 천민 가운데 두 명을 골라서 제물로 바쳤다.

한 명은 남자 시민 대신이었고, 또 한 명은 여자 시민 대신이었다. 두 사람은 시내를 끌려다니다가 성 밖으로 추방되어 돌에 맞아 죽었다. 이 관습은 재난이라는 이상 사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매년 5월에 열리는 타르겔리아 축제에서는 두 명의 제물이 한 명은 남자 시민 대신으로 또 한 명 은 여자 시민을 대신해서 아테네 밖으로 끌려 나와 돌에 맞아 죽었다.

벨테인

스코틀랜드의 하일랜드 지방의 중부인 웨일스 아일랜드 등에서는 5.1 일에 대대적인 의식을 거행했다. 벨테인의 불이라고 부르는 화톳불을 지폈는데 그때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흔적이 남아 있었다.

켈트 인이 인간을 제물로 태우는 관습을 지켜왔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적어놓은 것이다. 이 관습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켈트 인은 5년 마다 거행하는 대제에서 신들에게 바치기 위해서 죄를 지은 죄인을 모아두었다. 그런 제물의 수가 많을수록 대지가 그만큼 더 풍요로워진다고 믿고 있었다. 제물로 바칠 죄인이 적으면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로 모자라는 수를 채울 정도였다.

대제를 거행하는 날이 되면 드루이드 교의 사제가 제물을 바쳤다. 우선 나뭇가지로 엮거나, 나무와 풀로 엮는 거대한 상을 몇 개 만든다. 그 상 에 살아 있는 사람, 가축 그 외의 동물을 넣고 불을 붙여서 태워 죽였다.

​농민들이 매년 일정한 기간에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서 춤을 추거나 불 위를 뛰어넘는 관습은 태고부터 유럽 각 지역에서 행해졌다. 불 축제에서 인형을 싣거나 살아 있는 사람을 태우는 흉내를 내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또 고대에 실제로 살아 있는 사람을 태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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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위키백과 – 유럽의 역사